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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빌 전경 |
“헤밍웨이가 지금 파리에 왔다면, 아마도 벨빌(Belleville)에 머물렀을 것이다.” 파리를 소개하는 한 외국인의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헤밍웨이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몽파르나스(Monparnasse)에 거주하며 이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블로거의 눈에 오늘날 몽파르나스를 대신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벨빌 이었던 듯싶다. 197-80년대 몽파르나스는 지역 개발과 함께 유명한 예술가들의 거주지였다는 환영이 보태지면서 집값이 치솟았고, 더 이상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현실적인 거주지가 되지 못했다. 마치 철새가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듯 젊은 예술가들은 저렴한 거주지를 찾아 벨빌로 모여 들기 시작했고, 이는 파리의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의 이동 곡선을 그리며 벨빌이라는 젊은 예술가 서식지를 생성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곡선은 비단 예술가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의 한파가 세차게 몰아치던 2000년대 중반 파리 갤러리들에게서도 나타났다. 파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레(Marais)지구에 모여 있던 갤러리들이 경제위기로 하나둘 문을 닫아 가던 때에, 젊은 갤러리스트들은 임대비가 저렴한 벨빌에 새 둥지를 틀어가기 시작했다. 10여 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 갤러리를 꾸린 이들은 젊은 예술가들과 이웃하며 새로운 작가군을 지니고 새로운 전시들을 선보이며, 한참 침체되어 있던 예술시장 안으로 뛰어 들었다. 선뜻 납득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이러한 도전은 자칫 무모하다고 보여 질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이들의 과감한 도전을 관통해 갔다. 이로써 벨빌이라는 파리 변방의 새로운 예술 지형은 점차 파리 동시대예술현장에서 새로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근래에는 다소 단단한 지반을 형성 해 가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벨빌은 사실 그 이름만큼 고운 외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과거 노동자들의 주 거주지였던 벨빌은 19세기 코뮌 항쟁 때 마지막 바리케이트가 남겨질 정도로 가장 치열한 투쟁의 장소였고, 20세기 초부터는 많은 해외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가장 절박한 생존의 에너지를 뿜어내던 곳이다. 20세기 중후반 예술가들이 들어서면서도 이 지역은 예술적 여흥보다는 오히려 스쾃과 같은 또 다른 예술의 생존적 투쟁의 에너지가 보태지면서 화려한 도시 파리가 지닌 가상을 가차 없이 들추어내던 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역사들마저 환영이 되어 버린 지금의 벨빌은 다문화적 흥취와 예술적 혈기가 넘쳐나는 매우 힙한 지역으로 변모되었다. 그럼에도 낭만적 여유로움보다는 여전히 생존의 치열한 에너지들이 압도적인 곳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벨빌의 이러한 에너지는 이곳의 젊은 갤러리스트들에게서도 빗겨가지 않았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예술적 가치관과 시각으로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 작가군을 무기로 선정되기에도 다소 까다로울뿐 아니라 고가의 참가비를 지불해야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갤러리와 작가들의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인적, 물적 배경이 풍부하지 않았던 젊은 갤러리스트들로서 이들은 대부분 둘 이상의 파트너쉽을 발휘하며 각자 갤러리의 정체성과 인지도를 확보해 나가는 데 힘썼고, 이러한 파트너쉽은 갤러리들 간의 협업으로 확대 되었다. 둘 이상의 갤러리들이 함께 공동으로 아트페어에 참여하면서 경제적 부담을 덜고자 했고, 급기야는 벨빌 갤러리 협회라는 협업체를 조직해 벨빌의 갤러리 운영에 있어 서로 힘을 보태고자 했다. 이들은 갤러리 공간을 판매와는 무관하게 작가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전시들을 선보이고, 모든 갤러리들이 같은 날 동시다발적으로 전시 오프닝을 함으로써 더욱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는 데 힘썼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점차 예술계의 관심이 벨빌로 향하게 되었을 즈음, 2010년부터는 벨빌 비엔날레라는 지역의 예술 행사가 생겨났고, 이로써 벨빌에는 다문화+젊음, 그리고 예술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졌다.
현재 벨빌에는 10여 개의 갤러리들과 이 외의 소규모 예술공간들이 들어서 있고, 파리 동시대미술현장의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는 곳이 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활약은 유럽이라는 비교적 유리한 토대를 배경으로 지녔기에 가능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물적, 인적으로 풍부한 배경을 지니지 못한 젊은이들이 콜렉터라는 특수 구매층을 지닌 다소 제한적인 예술 시장에 뛰어 든 과감한 도전과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고자 한 열정,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 속에 스스로 체득해 나간 전략들을 통해 독립적으로 그 입지를 다져나가는 모습은 상당히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벨빌의 갤러리나 예술공간들이 제각각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나, 이들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기에 이들 중 세 곳만을 따로 떼어내어 전문적인 갤러리스트로서 그 입지를 다져나간 젊은 갤러리스트의 면모와 국제적인 갤러리로 성장해 나간 신생 갤러리의 전략, 그리고 마레지구에서 벨빌로의 이주를 통해 새로운 입지를 다져나간 갤러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1. 크레브코어 갤러리(Galerie Crévecoeur)
크레브코어 갤러리는 벨빌에서 가장 젊은 갤러리스트 악셀 디비(Axel Dibie)가 2008년 그의 나이 26세 때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이후 2009년부터 알릭스 디오노-모라니(Alix Dionot-Morani)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갤러리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악셀은 대학 졸업 후 옥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예술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다양한 갤러리 혹은 예술공간에서 아트딜러로서 혹은 큐레이터로서의 경험을 쌓아 갔다. 그리고 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알릭스는 루브르미술관과 팔레 드 도쿄 등의 미술관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좀 더 독립적인 길을 모색하던 가운데 악셀과 함께 갤러리스트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이 갤러리에는 현재 프랑스 작가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미국, 스코트랜드, 포르투갈, 베네수엘라 등 다양한 국가의 젊은 작가들 총 10명이 소속되어 있고, 소속 작가들 모두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작가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갤러리로서 파리 예술계의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소속작가들 외에도 신디 셔먼(Cindy Sherman), 나타니엘 멜로어(Nathaniel Mellors), 가브리엘 시에라(Gabriel Sierra) 등 동시대예술에 있어 주요한 작가들의 전시 혹은 다양한 프로젝트성의 전시들을 지속적으로 기획하면서 갤러리 공간을 상업적 목적이 아닌 다양한 예술적 맥락들을 재구성하고 제시하는 실험적인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을 판매하는 비즈니스는 아트 페어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나름의 가치관을 지니고, 매 년 바젤(Basel), 피악(FIAC), 프리즈(Frieze), 아르코(Arco) 등 다양한 국제 아트 페어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콜렉터 층을 확보해 왔고, 올해 피악에서는 전시한 모든 작품을 판매하는 좋은 성과를 얻어 냈다. 이는 지난 8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이들이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이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질문의 끈이었으며, 이러한 예술을 향한 진지한 관심과 열정을 기반으로 작가들을 발굴하고, 치열한 예술시장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가능성들을 제시했기에, 이들의 시도와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얻어가는 과정에 있는 듯하다. 때로는 큐레이터로 그리고 때로는 아트 딜러로 활약해 오고 있는 이들은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가지고서는 좋은 갤러리스트가 결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갤러리가 결코 예술 시장에만 편향되어 있어서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갤러리스트 역시 예술 현장과 예술시장을 동시에 아우르는 역량이 필수적 요건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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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브코어 갤러리스트 악셀과 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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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브코어 갤러리 전시 전경_ 호르혜 페드로 누녜즈(Jorge Pedro Nunez) “Entre Machine et Moi Machin”
ⓒGalerie Créveco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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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리스허틀링(BALICEHERTLING) 갤러리
발리스허틀링 갤러리는 다니엘 발리스(Daniele Balice)와 알렉산더 허틀링(Alexsander Hertling)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벨빌에 문을 연 이후, 현재 발리스허틀링 갤러리는 벨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갤러리로 명성이 나 있으며, 2011년부터는 뉴욕에 또 다른 공간을 오픈하면서 가장 빠른 성장을 가시화 하고 있다. 총 19명의 소속작가들은 프랑스 작가들 이상으로 미국 작가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뉴욕의 공간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기에 더욱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동시대예술현장에서 가장 트렌디한 작품을 보려면 발리스허틀링에 가라는 말들이 오갈 정도로 이 갤러리의 작가들은 대부분 젊은 작가들임에도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발리스허틀링의 작가들은 상업성보다는 실험성이 단연 돋보이는 작가들이며, 이는 갤러리스트들의 방향성과도 접목되는 지점이다. 벨빌의 많은 갤러리들이 그렇듯 발리스와 허틀링 역시 갤러리 공간을 자유로운 예술적 실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매우 유연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뉴욕의 갤러리 역시 미드타운의 수많은 거물급 갤러리들 사이에서 오히려 실험적인 프로젝트성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비평가 데이빗 르위스(David Lewis)와 함께 더욱 진지한 담론을 생성하고자 문을 연 뉴욕의 공간은 3년 후 데이비 르위스가 떠나간 후에도 지옥의 부엌(Hell’s Kitchen)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매체의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물론 발리스허틀링 갤러리 역시 작품 판매는 주로 국제 아트 페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더욱이 대규모 국제페어들 외에도 다양한 소규모 페어들에 참여하면서 더욱 확장된 콜렉터 층을 확보해 가는 가운데 다양한 예술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면모가 단연코 돋보인다. 가장 트렌디한 갤러리라는 명성은 오히려 트렌드를 생성해 나가는 갤러리라는 의미를 지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는 무엇보다 상업성보다는 예술 본연의 실험성과 새로운 담론 생성을 우위에 둔 이 갤러리스트들의 진지한 예술적 가치관과 전략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발리스허틀링 갤러리 외관 |
3. 부가다&카르녤 갤러리 (Galerie Bugada & Cargnel)
클라우디아 카르녤(Claudia CARGNEL)과 페데릭 부가다(Frédéric BUGADA)가 운영하는 부가다&카르녤 갤러리는 벨빌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2002년 마레 지구에 코스믹(Cosmic)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8년 전 벨빌의 오래된 창고 건물로 이주해 오면서 부가다&카르녤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운영해 오고 있다. 벨빌의 다른 갤러리들에 비해 오랜 시간 운영되어 왔고, 500㎡에 달하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소속작가들 역시 다양한 층위와 국적을 지니고 있기에 이 갤러리는 신생 갤러리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레 지구에서 벨빌로 이주해 오면서 이 갤러리는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의 분위기와 함께 더욱 많은 젊은 작가들을 확보해 나가면서 그 내용적인 면이 상당부분 새로워졌기에, 마레의 코스믹 갤러리에서 벨빌의 부가다&카르녤 갤러리로의 전환은 오히려 신생 갤러리로서의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이 갤러리는 다른 여느 갤러리와 달리 작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윈도나 눈에 띄는 간판이 없고, 기존 건물의 외벽에 크게 세겨진 기존의 창고 이름 아래에 커다란 철문이 닫힌 채로 있어 누구도 이 공간을 갤러리라고는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따라서 부가다&카르녤 갤러리를 이미 알고 있어 그 주소를 미리 검색해 보지 않고서는 이 갤러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굳게 닫힌 창고문을 애써 밀고 들어가면 확트인 공간의 높은 층고와 투명한 천장의 자연광 아래에 매우 자연스럽게 설치된 작품들은 갤러리 외관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이전의 마레지구에 있었던 코스믹 갤러리는 지금의 페로탕(Perrotin) 갤러리가 들어선 다소 고급스러운 건물에 있었기에 지금의 부가다&카르녤 갤러리와는 매우 대조적인 분위기를 풍겨 더욱 그렇겠지만, 벨빌로의 이주 이후 기존의 마레 갤러리가 지니고 있는 듯한 모든 무게감을 벗어버리고 벨빌의 다른 신생 갤러리들과 나란히 실험적이고 새로운 젊은 에너지를 담아내고자 한 면모는 벨빌의 예술 지형에 또 하나의 단단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갤러리라는 정체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기존의 창고건물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벨빌 자체의 장소성을 이 갤러리가 지닌 특성으로 녹아들게 한 시도 역시 과히 예술공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갤러리를 미리 알지 않고서는 놓쳐버릴 수 있기에 벨빌의 다른 갤러리들을 제처두고 반드시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빌의 여러 갤러리들을 방문하다 마주치게 될 부가다&카르녤 갤러리는 벨빌 갤러리의 또 다른 흥미로운 면모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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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다&카르녤 갤러리 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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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다&카르녤 갤러리 내부
ⓒGalerie Bugada & Carg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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